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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4.16 한국일보)'한센병 환자의 친구로 살았을 뿐... 내가 한 일은 없어'

admin 2018-01-31 20:40:26 조회수 3,004

11년 만에 소록도 다시 찾은 마리안느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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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고통과 세속의 외면을 신앙으로 견뎌낸 한센인 신자들이 직접 땅을 고르고 모래를 채취해 지은 소록도 2번지 성당의 모습.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상태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소록도의 큰 소나무에는 다 사연이 있다. 한 번쯤은 누군가 목을 맸을 정도로 자살기도가 많았기 때문이다.

소록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가슴 속 응어리가 사무친 농담이다.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는 조선총독부가 1916년

자혜의원(국립소록도병원 전신)을 설립하며 한센병 환자들이 정착해, 1933년에는 섬 전체가 나요양소가 됐다.

환자들은 중일전쟁(1937년) 전후로 시작된 강제노역, 감금, 강제 정관수술, 낙태 등을 겪었고 해방 후에도 몸이 허물어지는

육신의 고통, 세속의 편견과 배척,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이의 존재적 회의를 견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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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소록도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는 마가렛(왼쪽) 수녀와 마리안느(오른쪽) 수녀의 모습. 소록도성당 제공

 

 

환자들 스스로 ‘저주 받은 땅’을 부르짖던 섬에 인권 개념을 뿌리내린 것은 1962년 나타난 마리안느 스퇴거(82ㆍ당시 28세)

수녀와 마가렛 피사렉(81ㆍ당시 27세) 수녀였다. 의학적 무지로 한국인 의사조차 접촉을 기피하고 꼬챙이로 환부를

툭툭 치던 시절, 간호대학을 졸업한 두 앳된 수녀는 맨손으로 진료하고 환자들과 살을 맞대며 함께 밥을 지어먹었다.

43년간 헌신하던 두 수녀가 “나이 들어 부담을 주기 싫다”며 2005년 돌연 고향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일은 지난 10여 년 간

한국 천주교회에서 어느 성인의 역사 못지 않게 절절히 회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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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느 스퇴거 수녀는 26일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국립소록도병원에서 기자들과 만나 "무겁고 마음이 아프지만

부담되고 싶지 않아 (2005년 당시)조용히 소록도를 떠났다"며 "하루하루 친구로 소록도에 산 것일 뿐 특별한 일을 한 것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홀연히 떠난 소록도를 11년만에 다시 찾아온 마리안느 수녀는 26일 국립소록도병원에서 기자들과 만나 “치료 받은 환자들이

상태가 좋아져 집으로 돌아갈 때 가족들이 배웅을 나오며 반기고 안아주는 모습을 보는 일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또 “손 수술, 발 수술을 다 하고 병도 완전히 나았지만 기다리는 가족이 없어 돌아가지 못할 때 제일 마음이 아팠다”고 회고했다.

 

“제가 한 보잘것없는 일로 칭찬받고 싶지 않다”며 망설이는 그의 한국행을 설득한 건 3년 전 소록도성당에 부임한

김연준(47) 주임신부다. 11년 전 보좌신부로 소록도에서 마리안느와 함께 일했던 그는 재차 소록도행을 자청했고,

지난해 직접 오스트리아로 가 두 수녀를 만났다.

인터뷰를 피해 온 마리안느 수녀는 김 신부가 “근래 한국사회에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회의가 심하다”며 “희망을 주시고

제2의 마리안느가 나올 수 있게 재고해달라”고 호소하자 마음을 바꿨다. 13일 입국한 그는 약 1달간 머무르며

국립소록도병원 100주년 기념행사 등에 참석한다.

마가렛 수녀는 경증치매 등을 앓고 있어 함께 오지 못했다. 

 

“그저 예수님 복음으로 하루하루 살고 싶었고, 제가 하는 일 중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정말 많은 분들이 도와줬고 우리는

(환자들과)지금까지 친구로, 제일 좋은 친구로 살았어요. 1962년에 여기 왔을 때는 우리나라도 가난했고, 간호원이 부족했어요.

그저 부름에 따라 온 일은 알릴 필요가 없었는데….”

 

 이들은 현재 오스트리아에서 빈곤계층이 받는 최저수준의 국가연금으로 민가와 양로원에서 생활한다. 한국에선 수녀란 호칭으로

알려졌지만, 청빈 순명 정결을 서약하되 수녀원 밖에 머무르는 ‘재속회’ 소속이라 돌아갈 노후를 맡길 수녀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광주대교구와 소록도성당 측이 제안한 한국에서의 노후 보장과 금전 지원을 극구 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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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단출한 양로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마가렛 수녀의 모습. 그는 경증 치매 등 건강상 이유로 마리안느 수녀와

함께 방한하지 못했다. 소록도성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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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만에 방한해 환자들과 재회한 마리안느 수녀. 소록도성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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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 중인 24일 생일을 맞은 마리안느 수녀를 위해 소록도성당 신자들이 마련한 생일상에 놓인 사진. 마리안느 수녀는

이날 신자들의 축하 노래에 눈물을 흘렸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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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 중인 24일 생일을 맞은 마리안느 수녀를 위해 소록도성당 신자들이 마련한 생일상에 놓인 사진.

마리안느 수녀는 이날 신자들의 축하 노래에 눈물을 흘렸다. 소록도성당 제공

 

 

 오스트리아 그리스도 왕 시녀회 소속의 두 수녀가 처음 한국을 왔을 때는 5년 정도 머물 계획이었다. 마리안느 수녀는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격하곤 생명의 소중함을 지키는데 생을 바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의

후원으로 소록도에 의약품을 보급하고, 주택을 개량했다. 영아원, 결핵 병동, 정신과 병동, 목욕탕 건물을 지었다.

완치 후 섬 밖으로 자립해 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생활비까지 쥐어줬다. 국립소록도병원에서 33년간 간호조무사로 근무한

서판임(57)씨는 “최후의 보루인 소록도에서 손 마디 마디가 끊겨나가는 신경통 등을 앓는 환자 곁을 늘 지키던 두 분의

모습은 그 존재 자체가 큰 안심이자 롤 모델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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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만에 방한해 환자와 재회한 마리안느(왼쪽) 수녀. 소록도성당 제공

 

  

두 수녀는 습한 환경 때문에 숱하게 지네에 물리면서도 한 번도 집 수리에 돈을 쓰지 않았다.

43년 생활을 정리한 짐은 낡은 여행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한 완치환자는 “가족조차 부끄러워하는 내 등을 어루만졌던 수녀님이 보여 준 것은 사랑 그 자체”라며

“그런 분들이 우리에게 부담을 줄 까봐 딱 편지 한 장을, 그것도 멀리 광주에 가서야 부치고 가셨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두 수녀는 2005년 당시 남긴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제 저희의 천막을 접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친구들에게 제대로

일할 수 없고, 있는 곳에 부담을 줄 때는 본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자주 말해왔습니다. 그 말을 실천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대단히 감사 드립니다.

저희 부족으로 마음 아프게 해드렸던 일, 이 편지로 미안함과 용서를 빕니다. 항상 기도 안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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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순(왼쪽) 전봉업씨 부부는 젊은 시절 한센병으로 고통받았지만 각각 "아들이라도 건강하게 해주셔서", "많은 사제와

수녀님의 도움으로 생을 지탱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며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마리안느 수녀는 “여기서 죽어야지 생각했는데 2003년 대장암에 걸리고 세 번 수술을 받으니까 여기서 더 일은 못하니

조용히 가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진짜로 떠나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아주 어려웠고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말했다.

 

 마리안느 수녀가 다리를 놓아 연을 맺은 이공순(74) 전봉업(70)씨 부부는 두 수녀가 떠난 뒤 3달 넘게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엄마 잃은 고통’에 아파했다. 10대부터 한센병을 앓았고 합병증으로 40대에 완전히 실명한 전씨는 “아파서 진료 받아보고는 암이

아니라는 말에 실망할 정도로 죽고 싶은 순간이 많았지만, 자신도 디스크 등으로 고생하면서 환자들을 돌보는 마리안느 수녀님의

모습에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미사 때 반주자가 없어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실명 후 처음으로 음악을 배웠고

모든 성가를 외워 20년째 봉사하고 있다.

이씨는 “앞서 사별한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기도대로 병 없이 자란 게 너무 감사해 평생 갚으며 살고 싶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전씨에게 내 눈을 주고 싶다”는 편지를 마리안느 수녀에게 썼고, 이 일을 계기로 전씨와 연을 맺어

30년 넘게 남편의 손과 발과 눈이 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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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마리안느 수녀의 모습. 소록도성당 제공

 

 소록도 생활이 행복했냐는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마리안느 수녀는 “네 행복했어요. 이따 만큼. 하늘만큼요” 하며

양 손을 벌려 보였다. “예수님도 많은 고통을 받은 분이잖아요. 그 고통을 알게 되는 사람은 그 힘으로 살 수 있어요.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도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세요.”

 

 “수녀님”대신 “할매”로 불리길 바랐던 이 벽안의 ‘할매 천사’들이 베푼 사랑은 이 밖에도 크고 작은 기적을 낳았다.

영아원에서 자란 소위 미감아(未感兒ㆍ한센병 환자의 자녀를 ‘아직 감염되지 않은 아이’로 부르는 차별적 표현) 중

사제가 네 사람이 나왔다. 생일이면 직접 구운 빵을 선물하며 “탄생은 저주가 아니다”라고 다독이던 두 수녀의

생일축하 전통은 김 신부에 의해 지금껏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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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전 소록도성당 김연준(가운데) 주임신부와 수녀들이 한 한센인 신자의 집을 찾아 생일을 축하해주고 있다.

직접 신자의 집을 찾아 탄생을 축하하는 전통은 마리안느 수녀가 만들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병원간호사로 7년 넘게 일하던 최연정씨는 “두 수녀님처럼 살겠다”며 지난해 볼리비아로 떠나 빈민 구호에 헌신하고 있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기술학교를 세우겠다는 최씨의 계획에 한센인 신자가 선뜻 500만원을 내놓았고 이어 한 달 만에

1,000만원이 모였다. 성당 측은 매월 300만원씩을 볼리비아에 보낸다.

 

김 신부도 두 수녀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직접 법인을 설립해 다큐멘터리 등을 제작하고 있다. 그는 생의 위기에

봉착할 때 마다 “신부님, 예수님은 제자들 발 씻겨 주셨어요. 그거면 돼요” 하던 마리안느 수녀의 말을 되새긴다. 두 수녀의 흔적이

남은 치유의 길, 결핵 병동 등을 알리는 일도 준비 중이다. 치유의 길은 일제시대 강제노역에 지쳐 섬을 탈출하려던 환자들의

도주를 막기 위해, 당시 일본인 병원장이 한 겨울에 전체 환자 6,000명을 동원해 20일 만에 곡괭이로 4㎞ 넘게 닦아낸 길이다.

그 한 켠에 두 수녀가 직접 세웠던 과거 결핵 병동 건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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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치유의 길 옆으로 마리안느 수녀와 마가렛 수녀가 마련한 결핵 병동이 보인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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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준 주임신부가 소록도 2번지 성당에서 소록도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을 계기로 폐쇄된 차별의 상징인 환자 전용 부두 제비선창, 두 수녀가 헌신한

국립소록도병원 M치료실, 환자들이 직접 모래를 채취해 정성으로 지은 2번지 성당 등 소록도는 곳곳이

깊이 패인 상처요 역사다. 숱한 한센인의 피, 땀, 눈물이 스민 성당에서 김 신부는 눈을 빛냈다.

 

 “소록도는 대한민국의 진주입니다. 살을 찢는 고통과 그걸 이겨낸 사람들의 눈물이 빛나는 땅이죠.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가장 꼬이고 못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록도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온갖 고통, 자행된 악행,

이를 이겨내는 정신, 이를 보듬은 수녀님들의 존엄성 등을 보고도 그럴 수 있을까요.

이제 소록도가 우리를 이기심에서 탈출시키는 출발점이 돼야죠. 이제 우리 모두가 아픈 이웃에게 눈을

돌리고 마리안느 수녀님이 돼야 하지 않겠어요.”

 

고흥=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한센병이란

 

한센균에 의한 감염증이다. 개인 면역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건강한 사람은 균이 들어와도 발병하지 않는다. 지금은 대부분

생후 4주 전에 예방주사인 BCG주사를 접종한다. 현재 한센인은 과거 발병한 한센은 다 나았지만 후유증으로 지체불구 등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원하는 경우 여타 지역 대신 소록도에 거주하며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현재 소록도에는

한센인 700명 정도가 완치 상태로 후유증 등을 치료 받으며 거주한다. 일반인이 제한구역이나마 소록도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된 것은 1994년부터다.